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롤루스 왕조 (문단 편집) === 피핀 가문의 퇴보 === 피핀 가문의 2대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. 피핀 1세의 아들 '''그리모알드 1세'''는 궁재 직위를 물려받은 후[* 궁재 직위는 이때만 해도 엄연한 관직이어서 세습될 수 없었다. 세습의 시도는 간혹 있었지만, 대부분 다른 귀족 가문들 사이에 파문이 일어 척결되었다. 피핀 가문은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이 분열된 틈을 타 직위를 세습하는 데 성공한다.] 아들 [[킬데베르 3세|킬데베르]]를 앞세워 쿠데타를 시도하지만, 타 귀족들에게 원성을 사, 아들과 함께 암살당한다. 그리모알드 1세의 외조카이자 피핀 1세의 외손자인 '''[[피핀 2세]]'''는 쾰른 지방 귀족의 딸 플렉트루드와 결혼을 해 유럽 대륙의 요충지이자 풍요로운 지방인 쾰른을 획득하고, 그리모알드 1세가 살해당한 지 15년 뒤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를 역임하는 데 성공한다. 687년 '''[[테르트리 전투]]'''에서 승리해, 네우스트리아/[[부르군트]] 분국의 궁재가 되어, 3개 분국을 모두 한 손에 넣는다. 하나의 개인이 3개 분국의 궁재가 되는 것은 유례없는 사건으로, 피핀 2세는 '''[[프랑크]]의 [[공작(작위)|공작]]'''(Duke of the Franks)이란 칭호를 얻는다. 피핀 2세는 당시 [[유럽]]에서 가장 부유했던 [[프리슬란트]][* 현 [[네덜란드]], 독일 북해 인근 지방]를 점령하는데, 이것이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를 빌미로 일으킨 정복 전쟁이었다. 지금까지 프랑크 왕국은 대체적으로 [[기독교]]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가 잘 되어 있었다. 또 처음으로 강압선교가 시행되어, 지금까지 잘 받아주었던 선교자들도 정복국의 앞잡이로 보아, 후일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계기가 된다. 피핀 2세는 몇 차례 정복 전쟁 이후 유례없는 생전에 궁재로서[* 왕과 같은 행보에도 불구하고, 피핀 2세가 아직 궁재라는 것을 잊지 말자.] 세습을 준비한다. 하지만, 후계자로 지목하였던 두 아들들[* '''드로곤, 그리모알드 2세''']이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, 714년 피핀 2세 서거시에 궁재직은 12세의 어린 아들 '''테오드발트'''에게로 돌아간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